기사 메일전송
  • 기사등록 2018-02-10 15:44:52
기사수정

혼전계(混戰計) 적이 혼란한 와중을 틈타 승기를 잡는 전략이다.

 

제19계 부저추신(釜低抽薪) 가마솥 밑에서 장작을 꺼낸다.

 

제20계 혼수모어(混水摸魚) 물을 흐려 놓고 고기를 잡는다.

 

제21계 금선탈각(金蟬脫殼) 매미가 허물을 벗듯 위기를 모면하다.

 

제22계 관문착적(關門捉賊) 문을 잠그고 도적을 잡는다.

 

제23계 원교근공(遠交近攻) 먼 나라와 사귀고 이웃나라를 공격한다.

 

제24계 가도벌괵(假道伐虢) 기회를 빌미로 세력을 확장시킨다.

 

손자병법 제19계 부저추신(釜底抽薪) 가마솥 밑에서 장작을 꺼낸다.

 

부저추신은 36계 중19계로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뜻하며 솥 밑에 타고 있는 장작을 꺼내면 솥 안의 끓는 물을 식힐 수 있게 된다.

 

손빈은 대중 앞에서 가짜 공자의 정체를 폭로해 태후가 반란 집압을 방해할 수 없도록 한다.

동시에 반란군이 동요해 도주하게 함으로써 제의 반란이라는 물이 다시 끓지 못하게 한다.

 

한(漢)나라 경제(景帝)는 제후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중앙의 힘을 강화시키기 위해 조조(鼂錯)를 등용해 제후들의 영지를 삭감하기 시작했다.

 

BC 154년 이에 반발한 오(吳)나라 왕 유비(劉濞)와 초(楚)나라의 왕 유무(劉戊)가 조(趙), 교서(膠西), 교동(膠東), 치천(菑川), 제남(濟南) 등의 제후국과 연합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것이 바로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이다.

 

경제는 반란군을 무마하기 위해 조조를 처형했으나 오왕 유비는 오히려 황제를 칭하며 반란군을 이끌고 양(梁)나라를 공격했다.

 

양나라는 산동의 서남 지역과 하남의 동부와 남부에 걸쳐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 수도 장안(長安)을 점령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이기 때문이었다.

 

경제는 태위 주아부(周亞夫)를 장군으로 임명해 반란을 진압하게 했는데 주아부는 오나라의 정예부대를 주축으로 하는 반란군과 정면으로 부딪쳐서는 승산이 없다고 생각하고 식량을 차단하면 적이 자연히 궤멸하고 양나라에 대한 포위도 풀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주아부는 병마를 이끌고 형양(滎陽)으로 달려갔는데 형양은 왼쪽에는 식량, 오른쪽에는 무기고가 있는 요충지였기 때문으로 주아부는 부하 장수를 시켜 형양을 수비하게 하고 자신은 군사를 이끌고 창읍(昌邑)으로 물러나 굳게 지키는 한편 군사를 보내 오나라의 보급로를 끊게 했다.

 

이로써 오나라와 초나라의 식량 수송로는 완전히 차단됐는데 바로 솥 밑에서 타고 있는 장작을 다 빼낸 것이다.

 

오왕 유비와 초왕 유무는 양나라의 수도를 맹공격하다가 이 소식을 듣고 양나라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고 주아부와 한판 대결을 위해 군사를 몰아 창읍으로 진격했으나 이미 반란군의 식량 보급로를 끊어 버린 주아부는 반란군의 공격에 대응하지 않고 진지를 굳게 지키기만 했다.

 

양쪽 군대가 여러 날 동안 대치하는 상황에서 반란군은 식량이 떨어져 군사들이 굶주릴 지경이었으므로 조급한 마음에 자주 싸움을 걸었다가 결국 대패를 당하고 말았다.

 

오나라 병졸들은 많은 사람이 굶어서 죽고 나머지 사람들은 오왕을 배반하고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으며 오왕이 주도한 수십만의 반란군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한 채 자멸했고 반란은 석 달 만에 평정됐다.

 

반란군의 왕들은 모두 자살을 했거나 죽음을 당했고 이들의 영지는 모두 한나라의 직할령으로 편입됐으며 이로써 여러 제후의 권력은 약해지고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강화됐다.

 

전쟁에서는 이처럼 전체 국면에 영향을 미치는 관건을 장악해야 하며 적의 치명적인 부분을 공격해야 한다.

0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new.goodtime.or.kr/news/view.php?idx=791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후원 X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