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 기사등록 2018-02-10 14:18:08
기사수정

손자병법 제6계 성동격서(声东击西) 동쪽에서 소리 지르고 서쪽에서 공격한다.


성동격서는 제 6계로 이 계략은 거짓 행동으로 적을 헷갈리게 해 아군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게 하고 이로 인해 경비가 허술한 틈을 이용해 진격하여 승기를 잡는다는 뜻이다.


손빈은 중모를 공격하는 척 하여 방연을 성고에서 유인해 낸 후 성고를 공격하는 것이다.


성동격서의 대표적인 예로는 조조(曹操)가 1만 군대로 원소(袁紹)의 10만 대군을 격파한 관도(官渡)의 전투를 들 수 있다.


조조와 원소는 젊은 시절부터 경쟁을 했던 숙명의 라이벌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인연으로 원소는 증조부 원안(袁安)이 사도(司徒)가 된 후 4대에 걸쳐 삼공(三公)을 배출한 최고 명문가에서 태어난 귀공자였다.


원소의 가문만큼은 아니지만 조조 역시 표면상으로는 권문세가의 자제로 환관이 조정을 좌지우지하던 후한(後漢)의 환제(桓帝) 시대 환관의 최고 관직인 중상시(中常侍)였던 조등(曹騰)이 조조의 아버지 조숭(曹嵩)을 양자로 들인 덕분이었다.


조조의 집안은 원래 하후(夏候)씨였으나 이로 인해 조(曹)씨 성을 가지게 됐으며 조조나 원소는 모두 젊은 시절부터 비교적 탄탄한 정치적 경험을 쌓아 원소는 20세에 복양(澲陽) 현장(縣長)으로 재임하면서 청렴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조조도 20세에 효렴(孝廉)에 추천돼 관계에 진출한 후 유능한 관리로 활약했다.


당시 조조는 낙양북부위(洛陽北部尉)로 임명돼 엄격한 법 시행으로 낙양의 치안을 바로잡았으며 30세 때 제남국(濟南國)의 상(相)으로 승진한 조조는 뇌물이 횡행하고 독직 사건이 빈번했던 영내의 관료 8할을 면직시켰고 백성을 괴롭히는 제사를 엄금하는 등 눈부신 활약을 했다.


후한의 제12대 황제인 영제(靈帝)가 죽자 대장군 하진(何進)과 원소는 궁정 내의 환관을 일소할 계획을 세우고 동탁(董卓) 등 지방의 힘 있는 무장들을 불러들였으나 그 계획이 누설되는 바람에 하진은 동탁이 도착하기 전에 환관들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환관과 외척의 싸움에서 일단 환관이 승리를 거둔 것으로 궁중이 혼란에 빠지자 원소는 그 틈을 타 환관을 모두 살해해 버렸고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동탁은 상경하자마자 소제(少帝)를 폐하고 진류왕(陳留王)을 황제로 세웠으니 이 사람이 바로 후한 마지막 황제인 헌제(獻帝)다.

원소는 겉으로는 동탁에게 복종하는 척하다가 기회를 틈타 기주(冀州)로 도망해 동탁 토벌 동맹군을 결성한다.


조조 역시 진류(陳留)로 돌아가 가재(家財)를 흩어 군사를 일으켰으며 이처럼 각처에서 일어난 군웅들이 모여 반동탁군인 관동군(關東軍)을 결성하고 그 맹주로 원소를 분무장군(奮武將軍)으로 조조를 추대했지만 군벌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고 조조 혼자 동탁군과 맞서 고군분투하다가 군대는 대패하고 목숨까지 잃을 뻔했다.


원소는 동탁을 칠 생각보다는 따로 황제를 세운 후에 상황을 봐서 자신이 자리를 대신할 속셈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처럼 군벌들의 서로 다른 속셈 때문에 이 동맹군의 활동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한편 농서(隴西) 출신으로 농서 쪽에 세력 기반을 가지고 있던 동탁은 낙양에 있는 것 보다는 농서에 가까운 장안(長安)에 있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하에 헌제를 모시고 장안으로 돌아갔고 동탁은 낙양을 떠나면서 낙양을 완전히 파괴해 버리고 수백만의 백성들을 강제로 이주시켰다.


사도 왕윤(王允)이 동탁과 여포(呂布)의 사이를 갈라놓은 후 여포가 동탁을 살해하자 중앙 권력의 공백 상태가 생기게 됐으며 이 공백 상태를 자연스럽게 메운 것이 조조였다.


조조는 건안(建安) 원년(196) 헌제의 부름으로 낙양에 입성해 “천자를 옆에 끼고 제후를 호령하는(挾天子以令諸侯)” 중앙의 실질적인 세력으로 부상하게 되며 같은 해 조조는 낙양이 황폐해졌다는 이유로 헌제를 받들고 자기의 새로운 근거지인 허창(許昌)으로 천도하고 대장군(大將軍)이 된다.


조조는 헌제를 조종해 원소를 태위에 임명하고(원소는 이 직책을 거부했고, 조조는 다시 대장군의 직위를 원소에게 양보한다) 손권(孫權)을 파로장군(破虜將軍)으로 봉하고 회계태수(會稽太守)를 겸직토록 하는 등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하면서 급속하게 그 세력을 확장시켜 갔다.


건안 2년(197) 봄 원술(袁術)이 수춘(壽春)에서 황제를 칭하자 조조는 즉시 “천자의 명을 받들어 신하 되기를 거부하는 자에게 호령한다(奉天子以令不臣)”는 명분으로 원술을 쳐 멸망시킨 후 연이어 여포를 멸하고 장양(張楊)의 내분을 이용해 하내(河內)를 손에 넣었다. 이리하여 조조의 세력은 서쪽으로는 관중(關中), 동쪽으로는 연주(兗州), 예주(豫州), 서주(徐州)에까지 미치게 돼 황하 이남과 회수(淮水), 한수(漢水) 이북의 광활한 땅을 가지게 됐다.


원소는 건안 3년(198) 유주(幽州)의 공손찬(公孫瓚)을 멸망시키고 청주(靑州), 유주, 기주(冀州), 병주(幷州)를 얻어 황하 이북의 광대한 땅을 수중에 넣었고 많은 인재를 모았으며 10만의 정예부대와 1만의 기병을 갖추었다.


화북을 두고 조조와 원소 사이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으며 당시 조조는 원소의 대군 외에 또 하나 해결해야 할 세력이 있었으니 바로 동방에 있던 유비(劉備)로 유비가 원소와 힘을 합쳐 쳐들어올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건안 4년(199) 정월 조조는 신속하게 부대를 이끌고 서주(徐州)의 유비를 쳤는데 조조는 하비성(下邳城)을 공격해 유비의 대장 관우(關羽)를 생포했으며 유비는 패주해 원소에게 투신했고 장비(張飛)는 도망했다.


원소의 모사인 전풍(田豊)이 그 기회를 틈타 허창을 칠 것을 건의했으나 원소는 아들이 병이 났다는 등의 이유로 출병하지 않았다.


조조가 성공리에 출정을 마치고 관도로 돌아오고 난 후에야 원소는 비로소 여러 장수를 모아 허창 공격을 의논하자 모사 전풍은 이미 형세가 변했다며 원소에게 뒷날을 기약할 것을 건의했지만 원소는 전풍이 군심을 동요시켰다는 이유로 감옥에 넣어 버리고 허창 공격의 깃발을 높이 들었는데 이상이 바로 성동격서(声东击西)의 전략이 나온 관도 전투의 역사적 배경이다.


건안 4년(199) 6월 원소는 저수(沮受)를 감군(監軍)으로 10만 대군을 이끌고 그의 근거지인 업성(鄴城)을 출발해 황하를 건너 백마(白馬)를 손에 넣고 관도를 탈취해 허창을 함락할 계획을 세웠다.


조조는 곽가(郭嘉)와 순욱(荀彧) 등의 모사와 의논한 결과 당시의 형세와 쌍방의 정황 등을 고려해 볼 때 방어가 최선책이라고 판단하고 그해 8월 주력부대를 관도 일대에 포진시키고 원소를 기다렸다.


관도는 허창에서 200리 거리에 불과해 인후(咽喉)에 해당하는 전략적 요충으로 만약 관도를 잃으면 허창의 방어선이 뚫리는 셈이 된다.


원소는 병사가 많았으므로 조조군의 퇴로를 차단하는 작전으로 나와 안량(顔良)에게 1만 군사를 주어 조조군의 전략 요충지인 백마성(白馬城)을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군대를 이끌고 조조군을 섬멸하려고 했는데 충분히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있으니까 군사를 나눠 일거에 밀어붙이겠다는 생각이었다.


안량의 공격으로 백마성이 위급해지자 수비대장인 유연(劉延)이 조조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긴급 보고를 받은 조조는 대책 회의에서 모사 순유(荀攸)가 계책을 “원소의 근거지인 업성을 공격하는 척하면 원소는 반드시 군대를 나누어 업성을 구하러 갈 것으로 그러면 우리는 그 틈을 타 정예부대를 보내 백마성을 포위하고 있는 안량의 군대를 습격하는 책략을 내어 놓았다.


조조는 이 계책에 따라 군사를 이끌고 연진(延津)으로 출발하자 이 소식을 들은 원소는 군대를 몰아 급히 연진으로 달려갔고 순유의 예측대로 원소가 조조의 계략에 빠져 군대를 움직이자 조조는 즉시 방향을 바꾸어 백마성으로 향했고 백마성을 포위하고 있던 안량은 조조가 연진과 업성을 공격하러 군대를 움직였다는 소식을 듣고 느긋하게 있다가 조조의 기습을 받게 됐다.


이 전투에서 조조에게 상빈(上賓)의 대우를 받던 관우에게 안량이 죽자 안량이 이끌던 군대는 와해됐으며 이로써 백마의 포위는 풀리게 됐다.


한편 원소가 연진에 달려가 보니 연진은 무사했고 적의 함정에 빠진 것을 알게 된 원소는 급히 백마성으로 달려갔으나 성을 공격하던 군사들은 멸망당하고 안량은 이미 죽은 후였다.


원소의 공격으로부터 백마성을 더 이상 지키기 어렵다고 판단한 조조는 백성들을 이끌고 백마성을 빠져나왔는데 원소가 백마성을 점령하면 백성들을 살육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원소는 유비와 문추(文醜)를 보내 조조를 추격했지만 조조의 계략에 빠져 대패하고 명장 문추를 잃었다.


문추를 누가 죽였는지 정사에는 기록이 없으며 삼국연의(三國演義)에는 관우가 죽인 것으로 돼 있지만 실제로는 관우가 아니라 혼전 중에 누군가에 의해 죽었으며 원소의 적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조조는 일단 관도로 후퇴했다.


삼국지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원소는 10만의 정예부대를 거느리고 있었던 반면 조조는 겨우 1만의 군대밖에 없었으며(실제로는 3∼4만이었다고 한다) 원소의 군대도 관도까지 추격해 와 진영을 구축했고 원소군과 조조군은 반년 동안이나 대치했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고 초조한 쪽은 군량이 부족한 조조 측이었다.


이때 원소의 모사 허유(許攸)가 그의 계책들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데 불만을 품고 원소를 배반하고 조조의 진영으로 몸을 의탁해 허유는 조조가 전 병력을 관도에 포진하고 있으므로 텅 빈 허창을 습격할 것을 원소에게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다.


조조는 허유의 계책대로 원소의 군량미가 쌓여 있는 오소(烏巢)를 기습했고 조조가 오소를 습격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원소는 극소수의 구원병만 보내고 주력부대를 동원해 조조의 관도 진지를 공격했는데 숫자에 의거해 일거에 밀어붙이겠다는 계산이었다.


조조군은 방비만 할 뿐 나와 싸우지 않고 시간을 끌었으며 그 사이에 조조군의 특공대가 오소를 습격해 원소의 군량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구원병을 보내 오소를 지키자고 건의한 지모와 용기를 겸비한 명장 장합(張郃)은 모함을 받아 위험에 빠지게 되자 조조에게 투항해 버렸고 오소가 불탔다는 소식을 접한 원소군은 크게 동요하며 무너지기 시작했고 이 틈을 타 조조군은 총공격을 감행했다.


원소군은 크게 패해 10만 명의 군사 가운데 7만명 이상이 전사하고 원소는 800여 기병의 호위를 받으며 겨우 목숨을 보전해 북으로 도망쳤다.


관도의 전투에서 승리한 조조는 순욱의 주장에 따라 201년 4월 황하를 건너 북상해 창정(倉亭)의 전투에서 또다시 원소의 군을 깨뜨렸으며 원소는 업성으로 돌아갔고 조조는 허창으로 개선했다.


원소는 조조에게 대패한 충격으로 건안 7년(202) 4월에 병이 나 피를 토하다가 5월에 사망했으며 관도의 전투는 이렇게 끝났고 수년에 걸친 조조와 원소의 경쟁은 막을 내렸으며 이 이야기는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에서 볼 수 있다.

0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new.goodtime.or.kr/news/view.php?idx=778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후원 X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