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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02-10 14: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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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 제5계 진화타겁(趁火打劫) 상대의 위기를 틈타 공격한다.

 

진화타겁은 제 5계로 적이 위기에 처했을 때 공격을 가한다는 뜻으로 손빈이 초에 붙잡힌 것을 기회로 방연은 손자병법을 얻고자 한다.


춘추(春秋) 말기 오(吳)나라와 월(越)나라는 서로 이웃하고 있으면서도 원수처럼 싸우는 사이였다.


오나라의 왕 합려(闔閭)는 손무(孫武)와 충신 오자서(伍子胥)의 보필을 받아 당시의 제후국들을 굴복시키고 춘추오패의 반열에 올랐다.


합려 19년(BC496) 합려는 월나라를 쳤다가 월왕 구천(勾踐)에게 패하고 손가락에 입은 상처가 원인이 되어 그만 죽고 말았다.


합려는 태자 부차(夫差)에게 “월나라를 절대로 잊지 말라(必毋忘越)”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2년 후, 월왕 구천은 부차가 밤낮으로 병사들을 훈련시킨다는 말을 듣고 대부 범려(范蠡)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오왕 부차를 선제공격했다가 도리어 대패하고 말았다.

부차는 승세를 몰아 월나라의 수도 회계(會稽)를 포위했다.


월왕 구천은 패잔병 5000여명을 데리고 회계산(會稽山) 꼭대기에 피신해 백비(伯嚭)에게 후한 예물을 바치고 강화를 요청했다.


나라를 바치고 오나라의 신하가 되겠다는 것이 강화의 조건이었다.


오왕 부차는 오자서의 반대를 묵살하고 백비의 계책에 따라 월나라와 강화한 후 구천을 오나라로 불러 자기의 노예로 삼았다.


구천은 나라의 정치를 대신들에게 맡기고 대부 범려와 함께 오나라에 가서 3년 동안 부차의 마구간에서 말을 먹이는 일을 했으며 부차가 병이 들자 부차의 변까지 맛보아 가면서 몸소 간호하기도 했다.


부차는 충신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구천을 석방했다.


월나라로 돌아온 구천은 쓸개를 맛보며 ‘너는 회계의 치욕을 잊었느냐?’고 스스로에게 말하면서 설욕의 강한 의지를 불태웠다.


구천은 10년 계획을 세워 생산을 장려하고 물자를 모으며 전쟁 준비를 했다.


오왕 부차가 제(齊)나라를 공격하면서 월나라의 참전을 요청하자 군사를 파견해 오왕을 도와 그의 환심을 사 두기도 했다.


그런 후에 구천은 오나라의 내부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작업을 시작하며 먼저 뇌물을 좋아하는 오나라의 대부 백비를 매수했으며 부차에게 미인 서시(西施)를 바쳤다.


오나라에는 간신배가 득세했으며 자주 충간을 하던 오자서는 왕의 역린(逆鱗)을 건드린 결과로 왕의 의심을 사게 된 데다 백비의 모함까지 받아 왕이 내린 칼을 받고 자결했다.


오자서가 죽은 다음 해 오왕 부차는 제나라를 공격했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그후 2년 뒤에 부차가 정예부대를 이끌고 북정을 하고 황지(黃池)에서 제후들에게 한창 그의 위엄을 보이고 있는 동안 구천은 오나라가 비어 있는 틈을 타 오나라에 침입해 태자를 잡아 죽였다. 제후들과 회맹하는 자리에서 급보를 전해들은 오왕은 모든 사항을 극비에 부치고 서둘러 회맹을 마친 다음 즉시 월나라에 사자를 보내 강화를 요청했다.


월왕 구천은 일단 강화를 맺은 후 계속 군비를 확충했지만 오나라는 잦은 북정으로 군사들이 피로했기 때문에 휴식이 필요했으며 그 동안 많은 전쟁을 치르느라 병력의 손실도 적지 않았다.


4년 후 월나라는 다시 군대를 일으켜 오나라를 공격해 도처에서 오나라의 군대를 격파하고 3년에 걸쳐 오나라의 수도를 포위했다.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던 오왕 부차는 구천에게 항복한 후 자살했다.


구천은 오나라를 평정하고 그 여세를 몰아 북진해 회하(淮河)를 건너 서주(徐州)에서 제후들과 회맹하고 춘추시대 최후의 패자가 됐다.


이처럼 남의 나라가 내우와 외환에 시달릴 때 이 틈을 이용해 공격하는 것을 진화타겁(趁火打劫)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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