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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02-21 07:3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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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를 다 사용해 써도 그의 악행을 다 쓸 수 없다는 뜻으로 필설(筆舌)로 다 할 수 없으리만큼 죄악을 저질렀다는 격죽사난사(擊竹事難事)는 후한서(後漢書) 왕망전(王莽傳)에서 볼 수 있다.

 

전한(前漢) 말기에 왕망(王莽)이 한(漢)나라의 평제(平帝)를 독살하고 한나라를 뺏은 다음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올라 국호를 신(新)이라 부르고 왕조를 개창했다.


토지제도의 개혁에 있어 왕토사상(王土思想)을 내세워 전국의 토지를 왕전(王田)이라 해 매매를 금지시켰으며 전지(田地) 소유면적을 제한하고 지주와 호족(豪族)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쳐 3년 만에 폐지했다.

 

관제(官制)개혁도 행정의 원활성이 없어 관민이 모두 혼란에 빠졌으며 조정이 시장거래에 개입해 상품유통을 저해했으며 경제면에서 대혼란을 일으켰다.


한에 복속(服屬)한 군장(君長)을 후(侯)로 격하하는 등 주변 제민족(諸民族)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이런 혼란 속에서도 왕망은 백성들을 총동원해 광대한 지역에다 거대한 궁궐을 짓게 하니 가혹한 노동으로 인해 쓰러지는 백성의 수가 줄을 이었고 시체는 산을 이루자 악정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각지에서 벌떼처럼 궐기해 왕망 타도를 외치며 장안(長安)을 향해 진격을 개시했는데 이 당시 서주(徐州)의 상장군(上將軍)인 외효는 왕망타도의 격문(檄文)에서 '왕망의 죄는 초(楚)나라와 월(越)나라의 대나무를 모두 사용해도 다 쓸 수가 없을 정도'라고 말하며 농민군을 자극시켰다.


초나라와 월나라의 대나무로 만든 죽간(竹簡 대의 조각을 엮어서 만든 책)을 다 사용해 써도 그 악행을 다 적을 수가 없다는 뜻으로 여기서 초나라와 월나라는 대나무의 명산지다.


그 후 왕망은 한(漢)의 유수(劉秀)가 장안(長安)으로 진격하자 패사(敗死)했다.


왕망(王莽)은 중국 전한(前漢) 말의 정치가로 신(新) 왕조의 건국자로 자는 거군(巨君)이며 산둥(山東) 출생으로 한(漢)나라 원제(元帝)의 왕후인 왕(王)씨 서모의 동생인 왕만(王曼)의 둘째 아들로 갖가지 권모술수를 써서 사실(史實)상 최초로 선양혁명(禪讓革命)에 의해 전한의 황제권력을 빼앗았다.


왕 왕후의 아들 성제(成帝)가 즉위하자 왕망의 큰아버지 왕봉(王鳳)이 대사마대장군영상서사(大司馬大將軍領尙書事)가 돼 정치를 한 손에 쥐었다.


왕망은 불우하게 자랐으나 유학을 배웠고 어른을 잘 섬겼으므로 왕봉의 인정을 받아 황문랑(黃門郞)이 되고 봉읍(封邑) 1500호를 영유하는 신야후(新野侯)가 됐으며 그 뒤 왕씨 일족의 두령으로서 지위를 굳히고 38세로 재상이라 할 수 있는 대사마(大司馬)가 됐다.


다음의 애제(哀帝) 때에 신흥 외척의 압박을 피해 한때 정계에서 물러났으나 애제가 1년 만에 아들 없이 죽자 태황태후 왕씨와 쿠데타에 성공해 대사마에 복귀해 9세의 평제(平帝)를 옹립하고 자기의 딸을 왕후로 삼았으며 자기에게는 안한공(安漢公) 재형(宰衡)이라는 칭호를 붙여 평제의 보정자(輔政者)로서의 외관을 갖추었다.


그 뒤 평제를 독살하고 2세의 유영(劉拏)을 세워 당시 유행하던 오행참위설(五行讖緯說)을 교묘히 이용하며 인심을 모았으며 자기를 스스로 가황제(假皇帝)라 하고 신하들에게는 섭황제(攝皇帝)라 부르게 했다.


그리고 ‘안한공 왕망은 황제가 되라’는 붉은 글씨가 씌어진 흰 돌이 나타나게 하고 왕망이 황제가 되라는 하늘의 의사표시로 간주되는 새 우물을 출현시키는 연극을 벌였다.


이 신비적인 형태를 수반해 인간에게 표시되는 천명(天命)을 부명(符命)이라 하는데 왕망은 이 부명을 교묘히 이용해 유영을 몰아내 한 나라를 멸망시키고 국호를 신이라 해 황제가 됨으로써 선양혁명에 성공했다.


황제 왕망은 복고적 색채를 띤 여러 가지 번잡한 정책을 폈는데 주(周)나라 시대의 정전법(井田法)을 모방해 토지개혁을 단행했는데 이것은 지방호족의 대토지소유를 제한하고 자영농민의 빈민화를 막으려는 것이었다.


또 가난한 농민에게 싼 이자의 자금을 융자해 주는 사대제도(痂貸制度)를 두기도 했는데

이것도 사상적으로는 유교교전인 주례(周禮)에서 볼 수 있는 고전적인 것이나 화폐제도 개혁과 평준(平準) 균수(均輸) 등 여러 상공업통제책과 함께 당시의 현실이 요청하는 정책이었다.


그러나 개혁정책은 결과적으로 한 말의 여러 모순과 사회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모두 실패했는데 강력한 중앙집권적 전제지배를 꾀한 그의 정책은 오히려 농민들에게 고통을 주었고 각지에 있는 호족들과의 이해(利害)가 상반된 점에 실패의 원인이 있었다.


그는 대외정책에도 실패해 사회혼란을 증대시켰으며 흉노(匈奴)와 서역 여러 나라가 그를 이반(離反)했고 동쪽에서는 고구려와 충돌했으며 이와 같이 내외정세가 악화된 속에서 적미(赤眉)의 난이 일어났고 각지의 농민과 호족이 잇달아 반란을 일으켰다.


한나라 황족의 한 사람인 난양(南陽)의 호족 유수(劉秀)가 군대를 일으켜 이듬해 곤양(昆陽)에서 왕망의 군대를 크게 무찔렀다.


왕망은 장안(長安)의 미앙궁(未央宮)에서 부하에게 찔려 죽음으로써 건국한지 15년에 멸망하고 후한이 그 뒤를 이었다.


죽간(竹簡)은 2세기 초엽에 종이가 발명되기 전까지 가장 많이 사용된 서사재료(書寫材料)로 종이 이전의 종이라고 할 수 있으며 죽간을 만들려면 우선 대나무의 마디를 잘라낸 다음 마디 사이의 부분을 세로로 쪼갠 대나무패를 불에 쬐어 기름을 빼는데 이것은 글씨를 쓰기 좋게 하고 벌레 먹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며 길이는 20∼25cm이며 너비는 몇 cm로 한 줄밖에 못 쓰기 때문에 여러 장을 합쳐서 가죽 또는 비단으로 된 끈으로 편철(編綴)하는데 이와 같이 몇 장의 간(簡)을 편철한 것을 책(策) 또는 책(冊)이라고 불렀다.


죽간은 그 실물이 20세기에 들어와서 중국 북서쪽 볜징(邊京)에서 유럽의 학술탐험대에 의해서 한대(漢代)의 것이 발견됐으며 1951년 이후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 등지에서는 그 이전인 전국시대의 죽간도 잇달아 발견되고 있다.


또 죽간을 모방해서 만든 목간(木簡)도 사용됐는데 이것을 찰(札) 또는 첩(牒)이라고 불렀는데

중국의 북서쪽 볜징에서 발견된 것은 거의 목간이었으며 약(藥)의 처방전(處方箋) 등이 적혀 있는 죽간이 약간 포함돼 있었다.

 

오늘의 한자

 

擊 : 칠 격, 竹 : 대 죽, 事 : 일 사, 難 : 어려울 난, 事 : 일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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