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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 제16계 욕금고종(欲擒故纵) 큰 것을 위해 작은 것을 버린다.
손자병법 제16계 욕금고종(欲擒故纵) 큰 것을 위해 작은 것을 버린다.
욕금고종은 제 16계로 보다 유리한 입장에서 적을 없애기 위해 고의로 적의 경계를 늦추고 한껏 풀어주는 것으로 아군은 이 때를 기회로 적을 섬멸한다.
손빈은 반란 세력을 없애기 위해 이 계략을 이용해 공자 교사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를 제거 한다.
적을 지나치게 몰아붙이면 적이 도리어 맹렬하게 반격할 수가 있는데 마치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물기 때문에 적을 쫓되 다급하게 하지 말고 적의 힘을 고갈시키고 전투 의지를 쇠약하게 만들어 적을 분산시킨 후 사로잡아야 한다.
BC 506년 오(吳)나라는 당(唐), 채(蔡) 양국과 연합해 백거(白擧)에서 초(楚)나라 군대를 격파했는데 초나라 군대는 도망했으나 앞에 강이 가로막고 있었다.
오나라 왕 합려(闔閭)는 이를 전멸시키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추격하자 왕의 동생 부개(夫槪)가 만류하며 “궁지에 몰린 야수는 필사적으로 덤벼드는 법이며 하물며 상대는 손에 무기를 든 군대로 만약 초나라 군대가 더 이상 피할 곳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필사적으로 덤빌 것”이라고 말했다.
합려는 부개의 계책을 받아들여 초나라 군대가 강을 건너 도망할 수 있도록 했으며 초나라 군대는 도망치느라 급급해 오히려 전투 의지를 잃어버렸으며 합려는 다시 초나라 군대를 공격해 결국 초나라 군대는 대패했고 합려의 연합군은 초나라 수도 영(郢)을 점령했다.
편집국 편집장
2018-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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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 제15계 조호리산(調虎離山) 산에서 호랑이를 유인해낸다
손자병법 제15계 조호리산(調虎離山) 산에서 호랑이를 유인해낸다.
조호리산은 36계 중 제15계로 적을 유리한 고지에서 나오게 한다는 뜻으로 손빈은 이 계략으로 공자 교사를 위에서 나와 단신으로 귀국하게 해 손 쉽게 붙잡는데 성공한다.
한나라 말기 강족이 반란을 일으켜 서량 무도 일대를 휩쓸자 진압을 위해 파견된 우후(虞詡)는 강족의 대군에게 막혀 진군을 멈추게되자 우후는 조정에 상주해 증원을 요청하고 증원이 도착하면 출발한다고 선전했다.
강족은 이것을 듣고 대군을 미리도를 풀고 분산되어 더욱 노략질을 하고 다녔으며 적당한 때를 가늠해 우후는 무도를 향해 행군을 재개했다.
증원 따위는 실제로 오지 않았지만 머물 때마다 솥을 설치하기 위한 구덩이를 더 많이 파도록 했고 강족은 진지 터의 솥의 개수를 짚어 증원부대가 속속 도착해 병력이 증가하고 있는 것이라 믿고 공격을 하지 않았으며 우후는 감쪽같이 무도에 입성하는 데 성공해 강족의 반란군을 격파했다.
정형 전투 때 한신은 조나라 요새를 공격할 때 강을 뒤에 두고 포진해 적을 요새에서 끌어냈으며 이것이 후세에 유명한 배수진으로 한신은 병사들에게 물러나면 강에 빠져 죽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필사의 힘을 이끌어 조군의 공격을 막아내고 그 틈에 분견대를 이용해 요새를 점령했다.
그러나 본래 스스로 퇴로를 끊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며 죽음의 공포로 인해 전투력이 상승하는 것도 한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한신의 배수진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배수진을 미끼로 조군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요새에서 나와 야전에 돌입하도록 만든 점으로 요새라는 산에서 조군이라는 호랑이를 끌어냄으로써 한신은 전투에서 승리했다.
편집국 편집장
2018-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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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 제14계 차시환혼(借尸还魂) 죽은 혼이 다른 시체를 빌려 부활한다.
손자병법 제14계 차시환혼(借尸还魂) 죽은 혼이 다른 시체를 빌려 부활한다.
차시환혼은 제14계로 원래 뜻은 다른 형식을 빌어 죽은자를 부활시킨다는 것이다.
방연은 가짜 공자 교사로 죽은 공자 교사를 대신하게 하여 제의 반란 세력을 부활 시켰다.
동한(東漢) 말년 유비(劉備)는 손권(孫權)의 오(吳)나라와 연합해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조조(曹操)를 대파하고 형주(荊州)에 겨우 근거지를 만들게 됐다.
이때 조조는 다시 한중(漢中)의 장로(張魯)를 공격했는데 한중 바로 옆에 있는 익주(益州)태수 유장(劉璋)은 몹시 당황했다.
유장의 모사 장송(張松)은 조조가 한중을 얻었으니 반드시 익주를 치러 올 것이라며 차라리 유비를 불러 장로를 토벌하고 조조의 군대를 막자고 건의했다.
유장은 유비는 한 왕실의 종친이고 조조의 원수이며 용병에 능하니 그를 부르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고 장송의 건의를 받아들여 법정(法正)을 파견해 유비를 맞이했다.
법정은 유비에게 익주를 손에 넣으라고 권하며 자신과 장송이 안에서 호응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유비는 군대를 이끌고 장로를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유장에게서 많은 물자와 병마를 얻어 냈고 결국 참모 방통(龐統)의 계책에 따라 유장에게서 얻은 병마로 성도(成都)를 공격해 서천(西川)을 손에 넣었으며 이 땅을 근거지로 건국의 대업을 이뤘다.
한번 떠난 영혼은 본래의 몸체로 돌아오지 못하며 영혼은 할 수 없이 다른 사람의 시체라도 빌려 부활해야 한다는 것은 유비는 영웅의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지만 기반이 없어 죽은 사람의 영혼이나 다름없이 떠도는 운명으로 대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정착해 기개를 펼 수 있는 기반이 필요했지만 유비에게는 근거지로 삼을 만한 땅도 없었는데 유비는 마침내 영혼을 부활시킬 수 있는 시체를 하나 발견했으니 그게 바로 유약하고 무능한 유장이었던 것이다.
편집국 편집장
2018-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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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계 타초경사(打草驚蛇) 풀을 헤쳐 뱀을 놀라게 한다.
공전계(攻戰計) 자신을 알고 적을 안 다음 계책을 모의하여 적을 공격하는 전략이다.
제13계 타초경사(打草驚蛇) 풀을 헤쳐 뱀을 놀라게 한다.
제14계 차시환혼(借尸還魂) 죽은 영혼이 다른 시체를 빌려 부활하다.
제15계 조호리산(調虎離山) 호랑이를 산 속에서 유인해 낸다.
제16계 욕금고종(欲擒故縱) 큰 것을 얻기 위해 작은 것을 풀어 준다.
제17계 포전인옥(抛砖引玉) 돌을 던져서 구슬을 얻는다.
제18계 금적금왕(擒賊擒王) 적을 잡으려면 우두머리부터 잡는다.
손자병법 제13계 타초경사(打草惊蛇) 풀을 헤쳐 뱀을 놀라게 한다.
타초경사는 제13계로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적의 상황이 불확실할 때 각종 수단으로 풀을 건드려 뱀이 놀라 움직이게 한 다음 죽이는 것이며, 두 번째는 숨어있는 적에 신중하게 대처해 놀라지 않는 것 즉 적에게 아군의 의도를 들켜 수동적으로 변하지 않는 것이다.
손빈은 타초경사로 자객이 있는 곳을 알아내고 그를 놀라 움직이게 하여 죽인다.
BC 627년 진(秦)나라의 대장 맹명시(孟明視)는 진목공(秦穆公)의 명을 받아 군사를 이끌고 진(晉)나라에 투항한 정(鄭)나라를 치러 갔다.
정나라를 치기 위해서는 진(晉)나라 경내를 지나야 해서 출발 전에 대부 건숙(蹇叔)이 주의를 주었는데 “돌아오는 길에 효산(崤山)을 지날 때는 진(晉)나라 군사의 매복에 당하지 않도록 자세히 정찰하도록 하라”고 말했다.
진(秦)나라 군대는 정나라는 치지 못하고 활(活)나라를 치고 돌아오는 길에 효산을 지나가게 됐는데 부장인 서걸(西乞)과 백을(白乙)이 맹명시에게 “아군이 정나라 정벌에 나서고 활나라까지 멸망시켰으니 진(晉)나라의 원한을 샀을 것으로 효산은 진(晉)나라 경내이니 조심해야 하며 효산은 지세가 험악하니 분명 진나라가 대군을 매복시켰을 것이니 우선 산속의 요로를 살펴보고 적의 상황을 정찰해 보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맹명시는 자신의 군대가 강함만을 믿고 주변의 권고를 무시해 버리고 행군을 계속했는데 정오쯤에 맹명시의 부대는 진(晉)나라 군의 소부대를 발견하고 추격 명령을 내렸지만 지세가 험준한 곳에 이르자 사방에서 북소리가 우레처럼 울리며 복병이 쏟아져 나왔다.
결국 맹명시의 부대는 진나라의 매복에 걸려 많은 군사를 잃고 말았고 맹명시 등 세 명의 장군은 포로가 되고 말았는데 미리 적정을 살피지 않고 길을 정탐하지 않은 결과였다.
편집국 편집장
2018-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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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 제12계 순수견양(顺手牵羊) 기회를 틈타 양을 슬쩍 끌고 간다.
손자병법 제12계 순수견양(顺手牵羊) 기회를 틈타 양을 슬쩍 끌고 간다.
순수견양은 36계 중 제12계로 적의 작은 허점을 발견하면 큰 이익을 위협하지 않는 한 즉각 이용하여 작은 이익이라도 놓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손빈은 적과 대치하여 승리를 거둘 수 없자 수도가 빈 허점을 발견하고 수도를 공격한다.
BC 770년 정(鄭)나라 장공(莊公)은 노(魯), 제(齊) 양국과 연합해 송(宋)나라를 치려고 했다.
송(宋) 상공(殤公)이 주(周)의 천자에게 조회하지 않은 죄를 묻겠다는 것이었는데 송상공은 문무대신을 소집해 대책을 상의했다.
대사마 공부가(孔父嘉)는 “정나라가 군대를 동원해 우리나라를 치고 있으므로 국내가 비었을 것으로 이 틈을 타 우리가 정나라의 근거지인 영양을 습격하면 정나라 장공이 반드시 회군을 해 구하러 갈 것”이라는 계책에 따라 공부가는 군대를 이끌고 위(衛), 채(蔡) 양국 군대와 연합해 정나라 영양을 치러 갔고 정나라 장공은 회군했다.
공부가는 계책이 성공하자 철수하면서 지나가는 길에 대(戴)나라를 점령할 계획을 세우고 사자를 보내 길을 열어 달라고 청했는데 대나라가 공부가의 계획을 알아차리고 길을 열어 주지 않자 공부가는 대나라를 공격했다.
대나라는 정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자 정나라는 대나라를 구원하러 출병했으며 대나라는 성문을 활짝 열어 정나라의 구원병을 맞아들였다.
원래부터 대나라를 점령하겠다는 계략을 세우고 온 정나라는 이 기회를 틈타 대나라를 접수해 버렸으며 힘들여 대나라를 공격했던 공부가는 닭 쫓던 개 꼴이 되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힘들이지 않고 물건을 손에 넣는 순수견양의 계책으로 이런 기회는 대체로 우연히 그리고 갑자기 다가오므로 시세를 잘 파악하고 민첩하게 대응하면 생각지도 않았던 것을 순조롭게 획득할 수 있다.
편집국 편집장
2018-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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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 제11계 이대도강(李代桃僵) 복숭아대신 자두.
손자병법 제11계 이대도강(李代桃僵) 복숭아대신 자두.
이대도강은 제11계로 계책의 이름은 후대인이 지었다.
이는 장기의 차를 버리고 장군을 지키는 것과 같아 일부를 버리고 전체 승리를 하는 것을 뜻한다.
손빈은 이 계책으로 전기를 승리로 이끌고 제왕의 신임을 얻는다.
전국시대 제(齊)나라 대장 전기(田忌)는 내기에 빠져 공자들과 경마를 즐겼다.
어느 날 손빈(孫臏)은 그 내기를 구경하다가 경마의 허점을 간파했다.
당시의 경마는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를 한 조로 해서 3개 조가 각 한 번씩 차례로 세 번 경기를 벌이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손빈은 그 3개 조의 말을 각각 비교한 끝에 속력 역시 3등급으로 나뉜다는 것을 알게 됐으며 손빈은 전기를 부추겨 “내기를 다시 하시면 제가 장군을 이기게 해 드리겠습니다”라고 하자 전기가 이를 받아 들인다.
전기는 손빈을 믿고 왕과 공자들에게 다시 천금을 걸고 내기를 하자고 제안했다.
경기 시작 전에 손빈은 전기에게 승리할 수 있는 비방을 “장군의 제일 느린 하등 수레를 상대방의 가장 빠른 상등 수레와 달리게 하고 장군의 상등 수레는 상대방의 중등 수레와 장군의 중등 수레는 상대방의 하등 수레와 달리게 하십시오”라며 계책을 내어 놓았다.
손빈의 계책에 따른 결과 전기는 2승 1패의 전적으로 승리해 천금을 얻었다.
이 경우 상대방의 상등마와 대결했던 전기의 하등마는 전체적인 승리를 위해 희생을 당한 대신 말라 죽은 오얏나무에 해당된다.
편집국 편집장
2018-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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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 제10계 소리장도(笑裏藏刀) 웃음 속에 칼을 품다.
손자병법 제10계 소리장도(笑裏藏刀) 웃음 속에 칼을 품다.
소리장도는 제 10계로 살기를 감추고 겉으로 미소를 띄는 것을 말한다.
방연은 손자의 병법을 얻기 위해 손빈을 모함하여 위기에 삐트린다.
당(唐)나라 태종(太宗) 때 이의부(李義府)는 아부하는 재주가 뛰어나 황제의 깊은 환심을 산 덕분에 벼슬이 계속 높아져 처음에는 태자사인(太子舍人)이었다가 고조(高祖) 때에는 이부상서(吏部尙書)가 됐으며 나중에는 중서령(中書令)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이의부는 겉모습은 온화하고 공손했으며 사람들과 이야기를 할 때는 즐겁게 미소를 띠었으나 속이 좁고 음험했다.
이미 요직에 있고 권세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붙기를 바랐으며 자기 뜻을 조금이라도 거스르는 사람에게는 모해를 가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이의부의 웃음 속에는 칼이 들어 있다고 말했다.
언젠가 감옥에 순우(淳于)라는 성을 가진 미모의 여죄수가 있다는 말을 들은 이의부는 옥리인 필정의(畢正義)를 감언이설로 꾀어 그 여죄수를 석방하도록 한 후에 그 여자를 자기가 차지해 버렸다.
후에 왕의방(王義方)이 필정의를 고발하자 이의부는 필정의를 윽박질러 자살하게 만들고 그를 고발한 왕의방을 파직시켜 먼 변방 지역으로 유배시켜 버렸다.
이 이야기는 구당서(舊唐書) 이의부전(李義府傳)에 나오는데 이의부의 웃음 속에는 칼이 들어 있다는 말에서 소리장도가 유래했다.
당현종(唐玄宗) 때의 권신 이임보(李林甫)의 고사에서 유래한 구밀복검(口蜜腹劍)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편집국 편집장
2018-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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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 제9계 격안관화(隔岸观火) 강 건너 불 구경하다.
손자병법 제9계 격안관화(隔岸观火) 강 건너 불 구경하다.
강건너 불구경한다는 제9계로 앉아서 강 건너 불구경한다는 뜻으로 적 내부의 갈등을 지켜보며 어부지리를 얻는다는 뜻이다.
손빈은 한이 위를 맞아 전력을 다해 싸우게 하고 방연의 군력을 약화시켜 전세를 제에 이롭게 한다.
전한(前漢) 말기의 혼란 속에서 정치적 실권자로 떠오른 조조(曹操)는 관도(官渡)의 전투에서 당시 화북(華北) 지역 최대의 실력자인 원소(袁紹)를 격파했다.
원소는 겨우 목숨을 보전해 도망쳤다가 조조에게 대패한 충격으로 병이 나 피를 토하다가 사망했는데 원소가 죽고 막내아들 원상(袁尙)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기주(冀州)의 장관이 되자 장남 원담(袁譚)과 원상 사이에 불화가 생겼다.
조조는 이 틈을 타 원씨 형제들을 공격했지만 상대는 생각보다 막강했으며 적이 쳐들어오자 단결해 대항했기 때문이었는데 조조의 책사 곽가(郭嘉)가 “본래 원씨 형제들 사이에 내분이 있었으나 우리가 공격해 오히려 그들을 단결하게 만든 것으로 우리가 여기에서 물러가면 그들은 반드시 다시 싸우게 될 것이니 그들이 싸워 서로 피폐해질 때를 기다려 공격하면 쉽게 이길 수 있다”는 계책을 내어놓았는데 즉 강 건너 불구경하듯 일단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자는 곽가의 계책에 따라 조조는 군대를 철수시켰다.
눈앞의 적군이 물러가자 과연 원씨 형제는 다시 기주를 쟁탈하기 위해 서로 싸우기 시작해 결국 장남 원담이 기주를 차지했고 원상은 둘째 형 원희(袁熙)에게 피신했다.
조조는 형제로부터 고립된 원담을 먼저 쳐서 멸망시키고 원희와 원상은 노합하(老哈河)와 대릉하(大凌河) 유역에 거주하던 소수민족인 오환(烏桓)과 손을 잡고 재기를 도모하려 했다.
207년 5월 조조는 원씨의 잔존 세력을 일소하기 위해 오환의 근거지인 유성(柳城)을 공격했으며 여기서 패한 원씨 형제는 북쪽으로 달아나 요동태수 공손강(公孫康)에게 피신했는데 계속 공격을 하면 이들이 연합해 저항할 것은 분명할 것으로 조조는 이들을 더 이상 추격하지 않고 공손강이 원씨 형제의 머리를 보내올 때까지 기다리자며 군대를 허창으로 철수시켰는데 역시 격안관화의 전략이었다.
과연 조조의 예측대로 공손강이 사신을 파견해 원씨 형제의 머리를 가져오겠다고 했으며 원씨 형제가 몸을 의탁해 오자 공손강은 고민에 빠져 한편으로는 조조의 군대가 공격해 올까 봐 두렵고 한편으론 원씨 형제에게 당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공손강은 차라리 강한 조조의 편이 되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했으므로 원씨 형제의 머리를 들고 조조의 편이 된 것으로 이로써 조조는 화북 통일 작업에 종지부를 찍게 됐다.
조조는 당시 중국의 13개 주 가운데 연주(兗州), 기주(冀州), 청주(淸州) 유주(幽州), 병주(幷州) 등 다섯 주를 차지했는데 이 지역은 인구가 가장 많은 중원(中原) 지역이었기 때문에 천하의 절반을 차지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편집국 편집장
2018-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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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 제8계 암도진창(暗渡陳倉) 기습과 정면공격을 구사하다.
손자병법 제8계 암도진창(暗渡陳倉) 기습과 정면공격을 구사하다.
암도진창은 제8계로 한 대의 한신이 길을 닦는 척 하면서 다른 곳을 공격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했다.
정면에서 적을 견제하고 우회로 돌아 기습공격을 한다는 뜻으로 이 계책은 성동격서와 비슷하지만 달라 성동격서에서 중요한 곳이 공격 지점이라면 암도진창에서는 공격 노선이다.
손빈은 이 계략을 이용해 한의 군신들과 방연을 속이고 상당을 함락시켜 한을 떠난다.
최초로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이 죽은 후 도처에서 진(秦)나라의 포악한 정치에 항거하는 반란이 일어났는데 초(楚)나라의 귀족 출신인 항량(項梁 항우의 숙부)도 반란을 일으켜 초나라 회왕(懷王)의 손자를 찾아 회왕으로 옹립하고 초나라를 재건했다.
변방의 하급 관리인 정장(亭長)에 불과했던 유방(劉邦)도 소규모의 반란을 일으켜 활약하다가 항량에 가담했는데 얼마 후 항량은 진나라와 싸우다가 전사했고 항우(項羽)가 실세로 부상했다.
회왕은 진나라의 수도 함양(咸陽)을 중심으로 하는 수도권 지역인 관중(關中) 땅을 먼저 정복하는 사람을 그곳의 왕으로 삼겠다고 공약했는데 함양에 맨 먼저 당도해 진나라의 항복을 받아 낸 사람은 유방이었다.
뒤늦게 당도한 항우가 유방을 치려고 하자 유방은 살아남기 위해 관중 땅을 항우에게 바쳤으며 관중을 접수함으로써 천하를 쟁패하게 된 항우는 BC 206년 서초(西楚)를 건국하고 스스로 초패왕(楚覇王)이라 칭했는데 이로써 진나라는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지 16년 만에 완전히 막을 내렸고 천하는 항우의 손아귀로 떨어진 듯 보였다.
초패왕 항우는 모사 범증(范增)의 계책에 따라 초회왕을 의제(義帝)로 옹립하고 18명의 제후왕을 봉했고 역시 범증의 계책에 따라 위험인물인 유방을 중원에서 영원히 쫓아내기 위해 유방을 한왕(漢王)으로 봉하고 지금의 사천성(四川省)에 해당하는 한중 땅으로 보냈다. 항우는 또한 유방이 한중에서 중원으로 들어오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길목에 해당하는 관중 땅을 나누어 진나라에서 투항한 장수인 장한(章邯)을 옹왕(雍王)으로 사마흔(司馬欣)을 색왕(塞王)으로 동예(董翳)를 책왕(翟王)으로 각각 봉하고 주둔시켜 유방을 감시하고 그의 진출을 막으라는 임무를 주었다.
힘이 약한 유방은 항우와 관중에 주둔해 있는 세 왕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한중 땅과 중원 땅의 유일한 통로로 알려진 잔도(棧道)를 불태워 중원으로 다시 돌아갈 의사가 없음을 표시했다.
물론 이는 모두 장량(張良)의 계책에 따른 것으로 잔도를 불태워 버리면 관중으로 돌아갈 수 없을까 봐 걱정하는 유방에게 장량은 “관중에 들어가는 길은 잔도 말고도 옛길인 진창이 있다”고 말했다.
잔도란 잔각(棧閣) 또는 각도(閣道)라고도 하는데 섬서성, 감숙성, 사천성, 운남성 등 산간 오지의 절벽에 구멍을 뚫어 나무로 다리를 놓아 만든 일종의 도로로서 당시 서남 지역의 중요 교통로였다.
한중에 들어간 유방은 한신(韓信)을 대장군으로 임명하고 병사를 모으고 말을 사들여 힘을 축적해 수년의 준비 끝에 군사가 강해지자 유방은 중원 정벌을 결정하고 한신에게 천하를 얻을 수 있는 계책을 물었다.
한신은 “천하를 얻으려면 관중으로 다시 들어가 동쪽을 정벌해 초나라와 한나라가 양립하는 형세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했으며 한신의 계책은 공공연히 잔도를 보수해 감시의 눈길을 잔도로 집중시킨 뒤 실제로는 진창을 통해 나가는 것이었다.
유방은 번쾌(樊噲)와 주발(周勃)에게 1만 군사를 주어 석 달 내로 다리를 보수토록 했으며 다리를 놓는 일은 큰 공사였기 때문에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중간에 작전을 변경해 은밀히 번쾌와 주발을 불러들이고 다른 사람을 감독으로 파견했으며 잔도 보수 공사가 계속되자 관중에 주둔하고 있던 장한 등은 몹시 긴장해 군사를 잔도 쪽에 집중시켰다.
유방과 한신은 번쾌, 주발 등과 수만 명의 정예 군사를 거느리고 옛길인 진창을 통해 진격해 순식간에 관중 땅을 점령했고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가 항우의 휘하 제후들을 정벌하며 세력을 확장하고 최종적으로는 항우를 이기고 천하를 차지한다.
이 이야기는 사기(史記) 고조본기(高祖本紀)에 나오는데 공공연히 잔도를 보수하고 몰래 진창을 통해 관중 땅으로 나갔다는 이야기에서 암도진창(暗渡陳倉)이 유래했다.
편집국 편집장
2018-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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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계 무중생유(無中生有) 지혜로운 자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
적전계(敵戰計) 아군과 적군의 세력이 비슷할 때 기묘한 계략으로 적군을 미혹시켜 승리를 이끄는 작전이다.
제7계 무중생유(無中生有) 지혜로운 자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
제8계 암도진창(暗渡陳倉) 기습과 정면공격을 함께 구사한다.
제9계 견안관화(隔岸觀火) 적의 위기는 강 건너 불 보듯 한다.
제10계 소리장도(笑裏藏刀) 웃음 속에 칼이 있다.
제11계 이대도강(李代桃僵) 오얏나무가 복숭아을 대신해 죽다.
제12계 순수견양(順手牽羊) 기회를 틈타 양을 슬쩍 끌고 간다.
손자병법 제7계 무중생유(无中生有) 지혜로운 자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
무중생유는 제 7계로 없는 사실을 날조하여 모함한다는 뜻으로 전쟁에서 허위 사실을 퍼트려 적을 유인함을 말한다.
공손열은 이 계책으로 제왕이 손빈을 의심하게 하여 손빈과 전기를 제거하고자 한다.
756년 안록산이 난을 일으켰다.
옹구(雍丘) 현령 영호조(令狐潮)는 반군에 투항했고 진원현(眞源顯)의 현령 장순(張巡)은 1000여 장사들을 모집해 옹구성을 탈환했다.
영호조는 4만의 반군을 거느리고 옹구성을 공격했으며 장순(張巡)은 2000밖에 안 되는 군사를 데리고 필사적으로 저항하면서 반란군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해 많은 화살을 사용해 결국 화살이 다 떨어지고 말았다.
장순은 즉시 허수아비 천 개를 만들어 검은 옷을 입힌 다음 새벽에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허수아비를 성벽에 매달았다.
반란군은 장순의 군대가 줄을 타고 성벽을 내려와 기습하려는 것으로 착각하고 화살을 발사했다.
화살은 허수아비 몸에 고슴도치처럼 꽂혔다.
장순의 군대는 이렇게 해서 많은 화살을 벌어들였으며 이어 장순은 새벽에 진짜 병사들을 내려보냈다.
또 허수아비로 화살을 빼앗으려는 것으로 착각한 영호조의 군대는 화살을 쏘지 않았다. 그 사이 500여 명의 정예부대가 순식간에 성벽을 내려와 반란군을 기습했다.
이처럼 허상을 만들어 적을 미혹시키는 계책을 무중생유(无中生有)라고 한다.
이 계책은 적군 지휘관의 기질을 파악하고 이용해야 하는데 즉 두뇌가 단순한 사람이나 지나치게 신중한 사람일 경우에 이 계책이 먹히기 쉽다.
단순한 사람은 쉽게 믿고, 신중한 사람은 쉽게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지만 이런 기만전술은 같은 적에게 두 번 써먹을 수 없는 방법이다.
편집국 편집장
2018-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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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 제6계 성동격서(声东击西) 동쪽에서 소리 지르고 서쪽에서 공격한다.
손자병법 제6계 성동격서(声东击西) 동쪽에서 소리 지르고 서쪽에서 공격한다.
성동격서는 제 6계로 이 계략은 거짓 행동으로 적을 헷갈리게 해 아군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게 하고 이로 인해 경비가 허술한 틈을 이용해 진격하여 승기를 잡는다는 뜻이다.
손빈은 중모를 공격하는 척 하여 방연을 성고에서 유인해 낸 후 성고를 공격하는 것이다.
성동격서의 대표적인 예로는 조조(曹操)가 1만 군대로 원소(袁紹)의 10만 대군을 격파한 관도(官渡)의 전투를 들 수 있다.
조조와 원소는 젊은 시절부터 경쟁을 했던 숙명의 라이벌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인연으로 원소는 증조부 원안(袁安)이 사도(司徒)가 된 후 4대에 걸쳐 삼공(三公)을 배출한 최고 명문가에서 태어난 귀공자였다.
원소의 가문만큼은 아니지만 조조 역시 표면상으로는 권문세가의 자제로 환관이 조정을 좌지우지하던 후한(後漢)의 환제(桓帝) 시대 환관의 최고 관직인 중상시(中常侍)였던 조등(曹騰)이 조조의 아버지 조숭(曹嵩)을 양자로 들인 덕분이었다.
조조의 집안은 원래 하후(夏候)씨였으나 이로 인해 조(曹)씨 성을 가지게 됐으며 조조나 원소는 모두 젊은 시절부터 비교적 탄탄한 정치적 경험을 쌓아 원소는 20세에 복양(澲陽) 현장(縣長)으로 재임하면서 청렴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조조도 20세에 효렴(孝廉)에 추천돼 관계에 진출한 후 유능한 관리로 활약했다.
당시 조조는 낙양북부위(洛陽北部尉)로 임명돼 엄격한 법 시행으로 낙양의 치안을 바로잡았으며 30세 때 제남국(濟南國)의 상(相)으로 승진한 조조는 뇌물이 횡행하고 독직 사건이 빈번했던 영내의 관료 8할을 면직시켰고 백성을 괴롭히는 제사를 엄금하는 등 눈부신 활약을 했다.
후한의 제12대 황제인 영제(靈帝)가 죽자 대장군 하진(何進)과 원소는 궁정 내의 환관을 일소할 계획을 세우고 동탁(董卓) 등 지방의 힘 있는 무장들을 불러들였으나 그 계획이 누설되는 바람에 하진은 동탁이 도착하기 전에 환관들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환관과 외척의 싸움에서 일단 환관이 승리를 거둔 것으로 궁중이 혼란에 빠지자 원소는 그 틈을 타 환관을 모두 살해해 버렸고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동탁은 상경하자마자 소제(少帝)를 폐하고 진류왕(陳留王)을 황제로 세웠으니 이 사람이 바로 후한 마지막 황제인 헌제(獻帝)다.
원소는 겉으로는 동탁에게 복종하는 척하다가 기회를 틈타 기주(冀州)로 도망해 동탁 토벌 동맹군을 결성한다.
조조 역시 진류(陳留)로 돌아가 가재(家財)를 흩어 군사를 일으켰으며 이처럼 각처에서 일어난 군웅들이 모여 반동탁군인 관동군(關東軍)을 결성하고 그 맹주로 원소를 분무장군(奮武將軍)으로 조조를 추대했지만 군벌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고 조조 혼자 동탁군과 맞서 고군분투하다가 군대는 대패하고 목숨까지 잃을 뻔했다.
원소는 동탁을 칠 생각보다는 따로 황제를 세운 후에 상황을 봐서 자신이 자리를 대신할 속셈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처럼 군벌들의 서로 다른 속셈 때문에 이 동맹군의 활동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한편 농서(隴西) 출신으로 농서 쪽에 세력 기반을 가지고 있던 동탁은 낙양에 있는 것 보다는 농서에 가까운 장안(長安)에 있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하에 헌제를 모시고 장안으로 돌아갔고 동탁은 낙양을 떠나면서 낙양을 완전히 파괴해 버리고 수백만의 백성들을 강제로 이주시켰다.
사도 왕윤(王允)이 동탁과 여포(呂布)의 사이를 갈라놓은 후 여포가 동탁을 살해하자 중앙 권력의 공백 상태가 생기게 됐으며 이 공백 상태를 자연스럽게 메운 것이 조조였다.
조조는 건안(建安) 원년(196) 헌제의 부름으로 낙양에 입성해 “천자를 옆에 끼고 제후를 호령하는(挾天子以令諸侯)” 중앙의 실질적인 세력으로 부상하게 되며 같은 해 조조는 낙양이 황폐해졌다는 이유로 헌제를 받들고 자기의 새로운 근거지인 허창(許昌)으로 천도하고 대장군(大將軍)이 된다.
조조는 헌제를 조종해 원소를 태위에 임명하고(원소는 이 직책을 거부했고, 조조는 다시 대장군의 직위를 원소에게 양보한다) 손권(孫權)을 파로장군(破虜將軍)으로 봉하고 회계태수(會稽太守)를 겸직토록 하는 등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하면서 급속하게 그 세력을 확장시켜 갔다.
건안 2년(197) 봄 원술(袁術)이 수춘(壽春)에서 황제를 칭하자 조조는 즉시 “천자의 명을 받들어 신하 되기를 거부하는 자에게 호령한다(奉天子以令不臣)”는 명분으로 원술을 쳐 멸망시킨 후 연이어 여포를 멸하고 장양(張楊)의 내분을 이용해 하내(河內)를 손에 넣었다. 이리하여 조조의 세력은 서쪽으로는 관중(關中), 동쪽으로는 연주(兗州), 예주(豫州), 서주(徐州)에까지 미치게 돼 황하 이남과 회수(淮水), 한수(漢水) 이북의 광활한 땅을 가지게 됐다.
원소는 건안 3년(198) 유주(幽州)의 공손찬(公孫瓚)을 멸망시키고 청주(靑州), 유주, 기주(冀州), 병주(幷州)를 얻어 황하 이북의 광대한 땅을 수중에 넣었고 많은 인재를 모았으며 10만의 정예부대와 1만의 기병을 갖추었다.
화북을 두고 조조와 원소 사이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으며 당시 조조는 원소의 대군 외에 또 하나 해결해야 할 세력이 있었으니 바로 동방에 있던 유비(劉備)로 유비가 원소와 힘을 합쳐 쳐들어올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건안 4년(199) 정월 조조는 신속하게 부대를 이끌고 서주(徐州)의 유비를 쳤는데 조조는 하비성(下邳城)을 공격해 유비의 대장 관우(關羽)를 생포했으며 유비는 패주해 원소에게 투신했고 장비(張飛)는 도망했다.
원소의 모사인 전풍(田豊)이 그 기회를 틈타 허창을 칠 것을 건의했으나 원소는 아들이 병이 났다는 등의 이유로 출병하지 않았다.
조조가 성공리에 출정을 마치고 관도로 돌아오고 난 후에야 원소는 비로소 여러 장수를 모아 허창 공격을 의논하자 모사 전풍은 이미 형세가 변했다며 원소에게 뒷날을 기약할 것을 건의했지만 원소는 전풍이 군심을 동요시켰다는 이유로 감옥에 넣어 버리고 허창 공격의 깃발을 높이 들었는데 이상이 바로 성동격서(声东击西)의 전략이 나온 관도 전투의 역사적 배경이다.
건안 4년(199) 6월 원소는 저수(沮受)를 감군(監軍)으로 10만 대군을 이끌고 그의 근거지인 업성(鄴城)을 출발해 황하를 건너 백마(白馬)를 손에 넣고 관도를 탈취해 허창을 함락할 계획을 세웠다.
조조는 곽가(郭嘉)와 순욱(荀彧) 등의 모사와 의논한 결과 당시의 형세와 쌍방의 정황 등을 고려해 볼 때 방어가 최선책이라고 판단하고 그해 8월 주력부대를 관도 일대에 포진시키고 원소를 기다렸다.
관도는 허창에서 200리 거리에 불과해 인후(咽喉)에 해당하는 전략적 요충으로 만약 관도를 잃으면 허창의 방어선이 뚫리는 셈이 된다.
원소는 병사가 많았으므로 조조군의 퇴로를 차단하는 작전으로 나와 안량(顔良)에게 1만 군사를 주어 조조군의 전략 요충지인 백마성(白馬城)을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군대를 이끌고 조조군을 섬멸하려고 했는데 충분히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있으니까 군사를 나눠 일거에 밀어붙이겠다는 생각이었다.
안량의 공격으로 백마성이 위급해지자 수비대장인 유연(劉延)이 조조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긴급 보고를 받은 조조는 대책 회의에서 모사 순유(荀攸)가 계책을 “원소의 근거지인 업성을 공격하는 척하면 원소는 반드시 군대를 나누어 업성을 구하러 갈 것으로 그러면 우리는 그 틈을 타 정예부대를 보내 백마성을 포위하고 있는 안량의 군대를 습격하는 책략을 내어 놓았다.
조조는 이 계책에 따라 군사를 이끌고 연진(延津)으로 출발하자 이 소식을 들은 원소는 군대를 몰아 급히 연진으로 달려갔고 순유의 예측대로 원소가 조조의 계략에 빠져 군대를 움직이자 조조는 즉시 방향을 바꾸어 백마성으로 향했고 백마성을 포위하고 있던 안량은 조조가 연진과 업성을 공격하러 군대를 움직였다는 소식을 듣고 느긋하게 있다가 조조의 기습을 받게 됐다.
이 전투에서 조조에게 상빈(上賓)의 대우를 받던 관우에게 안량이 죽자 안량이 이끌던 군대는 와해됐으며 이로써 백마의 포위는 풀리게 됐다.
한편 원소가 연진에 달려가 보니 연진은 무사했고 적의 함정에 빠진 것을 알게 된 원소는 급히 백마성으로 달려갔으나 성을 공격하던 군사들은 멸망당하고 안량은 이미 죽은 후였다.
원소의 공격으로부터 백마성을 더 이상 지키기 어렵다고 판단한 조조는 백성들을 이끌고 백마성을 빠져나왔는데 원소가 백마성을 점령하면 백성들을 살육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원소는 유비와 문추(文醜)를 보내 조조를 추격했지만 조조의 계략에 빠져 대패하고 명장 문추를 잃었다.
문추를 누가 죽였는지 정사에는 기록이 없으며 삼국연의(三國演義)에는 관우가 죽인 것으로 돼 있지만 실제로는 관우가 아니라 혼전 중에 누군가에 의해 죽었으며 원소의 적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조조는 일단 관도로 후퇴했다.
삼국지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원소는 10만의 정예부대를 거느리고 있었던 반면 조조는 겨우 1만의 군대밖에 없었으며(실제로는 3∼4만이었다고 한다) 원소의 군대도 관도까지 추격해 와 진영을 구축했고 원소군과 조조군은 반년 동안이나 대치했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고 초조한 쪽은 군량이 부족한 조조 측이었다.
이때 원소의 모사 허유(許攸)가 그의 계책들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데 불만을 품고 원소를 배반하고 조조의 진영으로 몸을 의탁해 허유는 조조가 전 병력을 관도에 포진하고 있으므로 텅 빈 허창을 습격할 것을 원소에게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다.
조조는 허유의 계책대로 원소의 군량미가 쌓여 있는 오소(烏巢)를 기습했고 조조가 오소를 습격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원소는 극소수의 구원병만 보내고 주력부대를 동원해 조조의 관도 진지를 공격했는데 숫자에 의거해 일거에 밀어붙이겠다는 계산이었다.
조조군은 방비만 할 뿐 나와 싸우지 않고 시간을 끌었으며 그 사이에 조조군의 특공대가 오소를 습격해 원소의 군량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구원병을 보내 오소를 지키자고 건의한 지모와 용기를 겸비한 명장 장합(張郃)은 모함을 받아 위험에 빠지게 되자 조조에게 투항해 버렸고 오소가 불탔다는 소식을 접한 원소군은 크게 동요하며 무너지기 시작했고 이 틈을 타 조조군은 총공격을 감행했다.
원소군은 크게 패해 10만 명의 군사 가운데 7만명 이상이 전사하고 원소는 800여 기병의 호위를 받으며 겨우 목숨을 보전해 북으로 도망쳤다.
관도의 전투에서 승리한 조조는 순욱의 주장에 따라 201년 4월 황하를 건너 북상해 창정(倉亭)의 전투에서 또다시 원소의 군을 깨뜨렸으며 원소는 업성으로 돌아갔고 조조는 허창으로 개선했다.
원소는 조조에게 대패한 충격으로 건안 7년(202) 4월에 병이 나 피를 토하다가 5월에 사망했으며 관도의 전투는 이렇게 끝났고 수년에 걸친 조조와 원소의 경쟁은 막을 내렸으며 이 이야기는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에서 볼 수 있다.
편집국 편집장
2018-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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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 제5계 진화타겁(趁火打劫) 상대의 위기를 틈타 공격한다.
손자병법 제5계 진화타겁(趁火打劫) 상대의 위기를 틈타 공격한다.
진화타겁은 제 5계로 적이 위기에 처했을 때 공격을 가한다는 뜻으로 손빈이 초에 붙잡힌 것을 기회로 방연은 손자병법을 얻고자 한다.
춘추(春秋) 말기 오(吳)나라와 월(越)나라는 서로 이웃하고 있으면서도 원수처럼 싸우는 사이였다.
오나라의 왕 합려(闔閭)는 손무(孫武)와 충신 오자서(伍子胥)의 보필을 받아 당시의 제후국들을 굴복시키고 춘추오패의 반열에 올랐다.
합려 19년(BC496) 합려는 월나라를 쳤다가 월왕 구천(勾踐)에게 패하고 손가락에 입은 상처가 원인이 되어 그만 죽고 말았다.
합려는 태자 부차(夫差)에게 “월나라를 절대로 잊지 말라(必毋忘越)”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2년 후, 월왕 구천은 부차가 밤낮으로 병사들을 훈련시킨다는 말을 듣고 대부 범려(范蠡)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오왕 부차를 선제공격했다가 도리어 대패하고 말았다.
부차는 승세를 몰아 월나라의 수도 회계(會稽)를 포위했다.
월왕 구천은 패잔병 5000여명을 데리고 회계산(會稽山) 꼭대기에 피신해 백비(伯嚭)에게 후한 예물을 바치고 강화를 요청했다.
나라를 바치고 오나라의 신하가 되겠다는 것이 강화의 조건이었다.
오왕 부차는 오자서의 반대를 묵살하고 백비의 계책에 따라 월나라와 강화한 후 구천을 오나라로 불러 자기의 노예로 삼았다.
구천은 나라의 정치를 대신들에게 맡기고 대부 범려와 함께 오나라에 가서 3년 동안 부차의 마구간에서 말을 먹이는 일을 했으며 부차가 병이 들자 부차의 변까지 맛보아 가면서 몸소 간호하기도 했다.
부차는 충신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구천을 석방했다.
월나라로 돌아온 구천은 쓸개를 맛보며 ‘너는 회계의 치욕을 잊었느냐?’고 스스로에게 말하면서 설욕의 강한 의지를 불태웠다.
구천은 10년 계획을 세워 생산을 장려하고 물자를 모으며 전쟁 준비를 했다.
오왕 부차가 제(齊)나라를 공격하면서 월나라의 참전을 요청하자 군사를 파견해 오왕을 도와 그의 환심을 사 두기도 했다.
그런 후에 구천은 오나라의 내부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작업을 시작하며 먼저 뇌물을 좋아하는 오나라의 대부 백비를 매수했으며 부차에게 미인 서시(西施)를 바쳤다.
오나라에는 간신배가 득세했으며 자주 충간을 하던 오자서는 왕의 역린(逆鱗)을 건드린 결과로 왕의 의심을 사게 된 데다 백비의 모함까지 받아 왕이 내린 칼을 받고 자결했다.
오자서가 죽은 다음 해 오왕 부차는 제나라를 공격했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그후 2년 뒤에 부차가 정예부대를 이끌고 북정을 하고 황지(黃池)에서 제후들에게 한창 그의 위엄을 보이고 있는 동안 구천은 오나라가 비어 있는 틈을 타 오나라에 침입해 태자를 잡아 죽였다. 제후들과 회맹하는 자리에서 급보를 전해들은 오왕은 모든 사항을 극비에 부치고 서둘러 회맹을 마친 다음 즉시 월나라에 사자를 보내 강화를 요청했다.
월왕 구천은 일단 강화를 맺은 후 계속 군비를 확충했지만 오나라는 잦은 북정으로 군사들이 피로했기 때문에 휴식이 필요했으며 그 동안 많은 전쟁을 치르느라 병력의 손실도 적지 않았다.
4년 후 월나라는 다시 군대를 일으켜 오나라를 공격해 도처에서 오나라의 군대를 격파하고 3년에 걸쳐 오나라의 수도를 포위했다.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던 오왕 부차는 구천에게 항복한 후 자살했다.
구천은 오나라를 평정하고 그 여세를 몰아 북진해 회하(淮河)를 건너 서주(徐州)에서 제후들과 회맹하고 춘추시대 최후의 패자가 됐다.
이처럼 남의 나라가 내우와 외환에 시달릴 때 이 틈을 이용해 공격하는 것을 진화타겁(趁火打劫)이라고 한다.
편집국 편집장
2018-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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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 제4계 이일대로(以逸待劳) 쉬다가, 피로에 지친 적과 싸운다.
손자병법 제4계 이일대로(以逸待劳) 쉬다가, 피로에 지친 적과 싸운다.
이일대로는 제 4계로 아군의 힘은 아끼고 적은 피로에 지치게 해 승리를 거둠을 말한다.
손빈은 이 전략으로 위군을 지치게 만들어 승리를 거둔다.
적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은 꼭 싸움으로만 되는 것은 아니며 효과적인 방어로 강자를 약하게 만들고 약자를 강하게 만들 수 있으므로 적극적인 방어로 적군을 소모시켜 지치게 만들면 강한 적군은 약해지게 된다.
전국(戰國) 말, 진(秦)나라는 한(韓), 조(趙), 위(魏), 연(燕)을 잇달아 무너뜨린 후 여세를 몰아 초(楚)나라를 공격했다.
진왕은 장군들을 모아 놓고 의논하며 “초나라를 치려고 하는데 장군들의 생각에는 몇 사람이면 족하겠소?”라고 묻자 젊은 장군 이신(李信)은 “20만 명이면 족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진왕이 왕전(王翦)에게 묻자 왕전은 “60만 명이 아니면 안 된다”고 답하자 진왕은 “왕장군도 늙었구려, 무엇을 그리 겁내시오, 이장군은 과연 기개가 대단하오, 이장군의 말이 옳소”라고 말했다.
진왕은 이신과 몽념(蒙恬)에게 20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초나라를 치게 했다.
왕전은 자기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병을 핑계로 고향인 빈양(頻陽)으로 물러나 여생을 보내기로 작정했다.
이 싸움에서 진나라는 서전에서는 승리했으나 교만으로 해이해진 틈을 타 추격전을 벌인 초나라의 군대에 대패하고 말았다.
패전 보고를 받은 진왕은 친히 빈양으로 왕전을 찾아가 사과하고 출전을 요청하며 “과인이 장군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이신이 초나라에 욕을 당했소, 지금 초나라 병사들이 계속 밀고 들어오고 있는데 장군이 비록 병중이라고는 하지만 과인을 버려서야 되겠소?”라며 설득했고 왕전은 여러 차례 사양했으나 60만 대군을 거느린다는 조건으로 출전을 허락했다.
왕전이 새로 장군이 돼 병력을 증강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은 초나라는 전국의 군사를 총동원해 이에 대항했다.
왕전을 맞아 싸운 초나라의 장수는 항연(項燕)으로 왕전은 진지를 굳게 쌓고 지키기만 할 뿐 나가 싸우려 하지 않았는데 작전이었으며 나가 싸우지 않으면 맥 빠진 초나라 군대가 포위를 풀고 물러갈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으며 초나라 군대가 자주 싸움을 걸었으나 왕전은 이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매일 병사들을 편히 쉬게 하고 목욕을 하게 하면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넉넉히 보급했다.
왕전은 때로는 병사들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사기를 북돋아 주기도 했으며 한참이 지난 뒤에 왕전은 진중으로 사람을 보내 병사들이 어떤 놀이를 하는가를 알아봤는데 돌 던지기와 뜀뛰기를 한다는 보고를 받은 왕전은 이제 병사들을 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싸움을 걸어도 진군이 응하지를 않자 왕전의 예상대로 항연은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철수했다.
왕전은 이 기회를 타서 초군을 추격해 크게 깨뜨렸다.
기(蘄)의 남쪽에 이르러 장군 항연을 죽이자 총사령관을 잃은 초나라 군대는 패주하기 시작했고 왕전은 승세를 몰아 초나라 각지를 공략했으며 시황제 24년(BC223), 진나라 군대는 초나라 수도 수춘(壽春)을 점령하고 초왕 부추(負芻)를 포로로 잡았다.
왕전의 군사들처럼 진지에 도착해 충분히 쉬면서 사기가 올라 적군을 기다리는 것을 일러 이일대로(以逸待劳)라고 한다.
편집국 편집장
2018-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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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 제3계 차도살인(借刀杀人) 남의 칼로 사람을 해치다.
손자병법 제3계 차도살인(借刀杀人) 남의 칼로 사람을 해치다.
차도살인은 제 3계로 다른 사람의 손을 빌어 적을 없앰을 뜻하며 추상국과 공손열은 이 걔책을 이용해 초왕의 손을 빌어 손빈과 전기를 죽이려 한다.
춘추시대 정(鄭)나라 환공(桓公)이 회(鄶)나라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먼저 회나라의 유능한 인물을 파악해 명단을 만든 후 회나라를 공격한 후 이들에게 관작을 수여하고 토지를 나누어 줄 것이라는 소문을 퍼트렸다.
소문을 들은 회나라 왕은 자기 사람인 이들을 모두 자기 손으로 제거해 버리고 말았다. 그 후 정나라는 회나라를 공격해 간단히 멸망시켰다.
이처럼 계략을 잘 쓰면 적이나 제3국의 힘과 재물 등을 빌려 쓸 수가 있는데 이를 이르러 차도살인(借刀杀人)이라 한다.
편집국 편집장
2018-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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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 제2계 위위구조(围魏救赵) 위를 포위하고 조를 구하다.
손자병법 제2계 위위구조(围魏救赵) 위를 포위하고 조를 구하다.
위위구조는 제 2계로 손빈이 조를 구한 이야기에서 유래 됐으며 강한 적을 공격할 때 적의 약한 후방을 쳐 적이 후퇴하게 하고 전멸시킴을 뜻하며 손빈은 이 계책을 이용해 조를 구하고 방연을 대파한다.
손자병법(孫子兵法)의 저자로 알려진 손무(孫武)가 죽고 백 년쯤 지나 손빈(孫臏)이 태어났다.
손빈은 손자의 후손으로 일찍이 방연(龐涓)과 함께 병법을 배웠다.
방연은 공부를 마친 다음 곧바로 위(魏)나라에서 벼슬하며 혜왕(惠王)의 장군이 됐다.
그러나 스스로 손빈을 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으므로 미리 손빈을 없앨 계획을 세우고 은밀히 사람을 보내 손빈을 불러들였다.
손빈이 찾아오자 방연은 없는 죄를 뒤집어씌워 벌로 그의 두 다리를 끊고 이마에 묵(墨)을 넣었다.
그렇게 되면 손빈이 부끄러워서 숨어 살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손빈은 위나라의 수도 대량(大梁)을 방문한 제(齊)나라 사신을 비밀리에 찾아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자기를 구해 달라고 부탁했다.
사신은 손빈의 재능을 알아보고 몰래 자기 수레에 숨겨 제나라로 데려갔고 손빈은 곧 전기(田忌) 장군의 인정을 받아 그의 빈객이 됐다.
전기는 때마침 내기에 빠져 공자들과 경마를 즐겼다.
손빈의 계책에 따른 결과 전기는 2승 1패의 전적으로 승리하여 천 금을 얻은 일로 손빈을 더욱 신임하게 된 전기는 그를 위왕(威王)에게 천거했다.
위왕은 손빈과 병법에 관한 문답을 가진 뒤로 그를 스승으로 받들었다.
BC354년, 위나라 장군 방연이 위나라 혜왕의 명을 받고 조나라의 수도 한단(邯鄲)을 공격했다.
과거 위나라의 영토이던 중산(中山)을 위나라가 국상을 당한 틈을 타 조나라가 강점한 데 대한 설욕을 위한 공격이었다.
방연은 중산이 아주 작은 땅이며 조나라와 아주 가까이 있는 지역이므로 차라리 직접 조나라의 수도 한단을 치고 들어가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혜왕에게 진언했다.
혜왕은 방연의 계책을 받아들여 방연을 대장으로 삼아 한단을 치게 했다.
일 년여의 장기전에 위나라와 조나라 양측 모두 지친 상태에서 조나라는 제나라에 구원을 요청하면서 구해 주면 중산 땅을 주기로 약속했고 제나라 왕은 이를 수락하고 군대를 출병시켰다.
제나라 위왕은 손빈을 장군으로 삼으려고 했으나 손빈은 자신이 형여(刑餘)의 몸(전과자)이라는 이유로 고사했다.
위왕은 전기를 장군으로 삼고 손빈을 군사(軍師)로 삼되 손빈은 치차(輜車) 속에 앉아 작전 지휘를 하도록 했다.
출병 전에 손빈이 계책을 올렸는데 내용은 “실이 엉킨 것을 풀려면 잡아당기거나 두들겨서는 안 되며 싸움을 편들려면 덮어놓고 주먹만 휘두른다고 되는 것이 아니며 상대방이 노리는 점을 가로막을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무방비 상태의 허점을 칠 때 싸움은 자연 풀리는 것으로 지금 위나라와 조나라가 마주 싸우기 때문에 위나라에 남은 자는 다만 노약자에 불과할 것으로 이제 장군께서는 군사를 이끌고 위나라의 수도 대량을 신속히 점령해야 하며 이것이 바로 적의 허점으로 위나라의 군대는 도성을 구하기 위해 조나라에 대한 공격을 포기하고 말 것이며 이야말로 한 번 움직여 조나라의 포위를 풀고 동시에 위나라를 피폐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계책을 내어 놓았다.
전기는 손빈의 계책을 받아들여 위나라 수도 대량을 공격하는 한편 위나라 군대가 통과할 것으로 예상되는 계릉(桂陵)에 병사를 매복시켰다.
수도 대량이 위기에 처하자 방연의 위나라 군대는 과연 본국을 구하기 위해 회군하기 시작했고 위나라 군대는 급히 대량으로 달려가다 계릉에서 매복병에 당해 대패했으며 방연은 패잔병을 이끌고 대량으로 달아나 조나라의 포위는 자연스럽게 풀렸다.
이 이야기는 사기(史記) 손자오기열전(孫子吳起列傳)에 나오는데 이 계릉의 전투에서 사용된 전략에서 위나라를 포위해 조나라를 구했다는 뜻의 위위구조(围魏救赵)가 유래했다.
편집국 편집장
2018-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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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 제1계 만천과해(瞒天过海) 하늘을 가리고 바다를 건넌다.
손자병법 제1계 만천과해(瞒天过海) 하늘을 가리고 바다를 건넌다.
만천과해는 제 1계로 계책의 이름은 당나라 때 생겼으나 춘추전국시대에 더욱 많이 사용됐다.
하늘은 황제를 가리키며 바다는 극복하기 어려운 큰 어려움을 말한다.
이 계책은 적에게 계략을 밝히는 대신 그 속에 진짜 계략을 숨겨두어야 성공할 수 있다.
손빈은 이 계책으로 초왕과 방연을 속이고 위기에서 벗어난다.
사마염(司馬炎)이 위(魏)나라를 찬탈하고 세운 진(晉)나라는 265년부터 420년까지 156년간 존속했는데 주(周)나라가 서주와 동주로 나누어졌듯이 진나라도 서진과 동진으로 나누어졌다.
전반 52년 동안은 수도를 서쪽의 낙양(洛陽)에 두었기 때문에 서진(西晉 265∼316)이라고 하고 후반 104년 동안은 수도를 동쪽의 건강(健康 남경(南京))에 두었기 때문에 동진(東晉 317∼420)이라고 한다.
서진은 귀족들의 사치와 부패와 내란으로 말미암아 소수민족들에 의해 316년에 전복됐고 다음 해인 317년에 황족인 사마예(司馬睿)가 건강에서 다시 진나라를 세웠으니 이것이 바로 동진이다.
이 동진 왕조와 때를 같이해 흉노(匈奴), 선비(鮮卑), 갈(羯), 저(氐), 강(羌) 등의 다섯 개 이민족(五胡)이 16개의 나라를 세워 중국의 북부를 장악했는데 이를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이라고 한다.
420년부터 중국은 남북조(南北朝) 시대에 접어글어 이 기간 동안 남방에서 동진이 멸망하고 송(宋 420∼479), 제(齊 479∼502), 양(梁 502∼557), 진(陳 557∼589)의 4개 왕조가 차례대로 들어섰고 북방에는 오호십육국이 멸망하고 북위(北魏 386∼534), 동위(東魏 534∼550), 서위(西魏 535∼556), 북제(北齊 550∼577), 북주(北周 556∼581)의 5개 왕조가 들어섰다.
581년 양견(楊堅)이 북조의 마지막 왕조인 북주(北周)의 정권을 찬탈하고 수(隋)나라를 세웠으니 이이가 바로 수문제(隋文帝)다.
수문제 양견은 정열적으로 정사에 임해 국력을 크게 신장시켰다.
한편 남조의 마지막 왕조 진(陳)나라의 마지막 황제 진숙보(陳叔寶)는 밤낮으로 주색과 유흥에 빠져 정사를 등한히 하고 있어 나라의 장래를 우려한 대신 장화(章華)가 황제가 주색에 빠져 정치를 외면하는 것을 꾸짖고 이의 시정을 촉구하는 상서를 올렸다가 도리어 사형을 당하고 말았다.
수문제는 복야(僕射)인 고경(高熲)에게 진나라를 멸할 계책을 묻자 고경은 “강남의 곡식이 강북보다 먼저 익으며 강남의 수확철에 우리가 출병을 해 진나라를 친다고 거짓 정보를 흘리면 저들은 분명 수확을 포기하고 군대를 주둔시켜 우리의 공격에 대비할 것이나 우리는 출병을 하지 않으며 이런 식으로 몇 년간만 하면 우리가 공격한다는 말을 믿지 않고 더 이상 우리의 공격에 대비하지 않을 것으로 그때 가서 갑자기 장강을 건너 공격하면 꼼짝없이 당하게 될 것이고,
또 한 가지 강남은 양식을 우리 북방처럼 토굴을 파고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갈대나 대나무로 엮은 창고에 저장하니 몇 년 동안 반복적으로 몰래 사람을 보내 불을 질러 버리면 진나라의 국력은 크게 손실을 입게 될 것”이라고 답했다.
수문제는 고경의 계책을 받아들여 무려 7년 동안 준비를 했고 588년 겨울 진나라 토벌에 나섰다.
수문제는 진숙보의 죄목 20가지를 열거한 전단 30만 부를 강남(江南) 지방에 뿌리고 아들 양광(楊廣 후의 수양제(隋煬帝))를 원수로 임명하고 하약필(賀若弼)을 행군총관(行軍總管)으로 임명한 후 공격 명령을 내렸다.
하약필이 이끄는 수나라 군대는 양자강(揚子江) 북쪽 연안 광릉(廣陵)에 진지를 구축하고 주둔했는데 즉시 강을 건너 작전을 개시하지 않고 다른 계책을 세웠다.
하약필은 부하 군사들을 시켜 상인으로 가장해 배를 대량으로 구입한 후 대부분의 배를 숨기고 강변에는 단지 열몇 척의 부서진 배만을 남겨 두자 진나라 왕 진숙보는 수나라 군대가 강 맞은편에 다다른 것을 알고는 몹시 놀라고 당황했으나 수나라 진영에 부서진 배 몇 척만 있는 것을 알게 되자 점차로 안심하기 시작했다.
며칠 후 수나라군이 주둔했던 강변에 갑자기 깃발이 나부끼고 창칼을 높이 쳐든 대규모 부대가 행동을 시작하자 대규모의 군사행동을 본 진숙보는 바짝 긴장해 모든 군대를 장강(長江) 남안에 배치시켰지만 수나라 군대는 빈번하게 수비 임무를 교체했으나 도강작전의 낌새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진나라는 수나라가 방어를 위해 온 것으로 인식하고 방비의 필요성이 없다고 생각하고 증원부대를 철수시키자 하약필은 이 소식을 탐지한 후 강변에 말을 풀어 사냥을 시작했다. 진나라는 수나라 군대가 쳐들어오는 것으로 착각하고 다시 방비를 강화했으나 수나라 군대는 사냥만 했을 뿐 공격을 할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진나라 군대는 마침내 안심하게 됐으며 그때부터 진나라 군대는 순찰을 돌지 않았으며 진숙보는 술을 마시며 즐기기까지 했다.
마침내 공격을 할 때가 되었음을 파악한 하약필은 야간에 군대를 이끌고 미리 준비한 배를 타고 장강을 건넜고 아무런 방비도 없이 꿈에 취해 있던 진숙보는 꼼짝 못 하고 당하고 말았다.
동이 틀 무렵 하약필의 군대는 장강 남쪽의 진나라 군대를 모조리 섬멸하고 수나라 군대는 순조롭게 남진해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 역사상 장기간의 분열 시기였던 남북조시대를 마감했다.
만천과해(瞒天过海)는 이처럼 거짓으로 진실을 숨기는 계책으로 위장과 거짓으로 아군의 집결과 공격 시간을 숨김으로써 방비가 해이해진 상대를 불의에 습격해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편집국 편집장
2018-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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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
춘추전국시절 세상을 초월한 기인 귀곡자(鬼谷子)에게는 마음에 드는 수제자 둘이 있었는데 하나는 손빈이고 다른 하나는 방연(龐涓)이다.
방연은 손빈보다 먼저 산에서 내려와 귀곡자는 거의 사라지다시피한 손자병법을 손빈에게만 전수해주게 된다.
방연은 방성(方城)에서 위(魏)나라 대군을 이끌고 초(楚)나라 군대와 접전을 펼치고 손빈은 손자병법을 이용해 방연을 도와 초나라 군대를 크게 물리치게 되지만 방연은 손빈의 재능을 시기해 웃음 속에 칼을 숨긴 채 손빈을 모함해 손빈은 처벌을 받게 된다.
방연의 책사 공손열은 아름다운 여인 종리추(鍾離秋)를 얻기 위해 방연의 음모를 손빈에게 알려주고 손빈은 미치지 않았으면서 미친 척하며 자신이 적어 놓은 병법을 모두 태워 버린다.
종리추는 손빈이 정말 미치지 않았길 바라며 손빈에게 자신의 진정한 감정을 털어 놓지만 손빈은 여전히 미친 척 할 뿐이고 이로 인해 뒤에서 몰래 손빈을 감시하던 방연은 손빈이 정말 미쳤다고 생각한다.
종리추의 언니 종리춘(鍾離春)은 손빈이 미친 척하는 이유를 알아채고 혼자 손빈의 고향인 제(濟)나라로 와서 제나라 대장군 전기(田忌)에게 손빈을 구해줄 것을 요청해 전기는 금활(禽滑)을 위(魏)나라로 보내고 손빈은 금활의 도움으로 매미가 허물을 벗듯이 위나라에서 도망칠 수 있게 된다.
한편 전기는 말(馬)을 좋아해 큰 돈을 걸고 제나라 왕과 경마 시합을 벌였는데 손빈이 오이로 복숭아를 대신하는 전법을 사용해 전기가 승리를 거두게 하고 전기는 손빈의 계책을 제나라 왕에게 얘기해 손빈을 중용하게 한다.
손빈은 제나라 군대를 이끌고 위나라를 포위해 조(趙)나라를 구한다(圍魏救趙), 도적 떼를 잡으려면 도적 떼 우두머리를 잡아야 한다(擒賊擒王), 쉬면서 힘을 비축해 피로한 적군을 맞아 싸운다(以逸待勞)는 손자병법에 나오는 유명한 전법으로 방연을 세 번이나 물리치고 이에 방연은 공손열을 몰래 제나라로 파견하고 공손열은 없는 사실을 꾸며내는 전법(無中生有)을 이용해 전기와 손빈의 병권을 잃게 하고 칼을 빌려 사람을 죽인다(借刀殺人) 전법을 써 전기와 손빈은 초나라에서 목숨을 잃을 뻔한다.
방연은 남의 집에 불난 틈을 타 도둑질을 한다는 말처럼 손빈에게 억지로 손자병법을 다시 쓰게 한다.
그 후 손빈은 종리춘의 도움으로 제나라로 돌아가며 방연과 초나라 왕은 연합해 손빈을 내놓으라고 제나라를 위협하자 금활은 겉은 그대로 두고 내용만 바꾸어 낸다(偸梁換柱)는 전법으로 손빈과 종리춘을 도와 초나라를 거쳐 한(韓)나라로 도망가게 한다.
그후 제나라 왕은 전기와 손빈에게 못쓸 짓을 저질렀던 것을 후회하고 태자에게 손빈을 다시 데려오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고 손빈과 함께 한나라로 도망갔던 종리춘이 제나라의 황후가 된 후에야 비로소 손빈은 제나라로 돌아오게 된다.
제나라로 돌아온 손빈은 많은 전법과 계책으로 그 동안 잃어 버렸던 제나라의 도시들을 다시 되찾게 되고 방연은 마릉도(馬陵道)에서 손빈의 매복을 당해 자살해 죽는데 손빈의 마지막 계책은 주위상계(走爲上計)였다.
그 후 손빈은 방연을 물리치고 아무도 몰래 떠나면서 두 권의 병법책을 남겼는데 한권은 손자병법이고 다른 한권은 손빈병법이다.
손자병법 36계를 분류해보면
승전계(勝戰計) 아군의 형세가 충분히 승리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을 때 말을 타고 적을 압도하는 작전을 말하며 1계부터 6계까지다.
제1계 만천과해(瞞天過海) 하늘을 가리고 바다를 건넌다.
제2계 위위구조(圍魏救趙) 위나라를 포위하여 조나라를 구하다.
제3계 차도살인(借刀殺人) 남의 칼로 사람을 해치다.
제4계 이일대로(以逸待勞) 쉬다가 피로에 지친 적과 싸운다.
제5계 진화타겁(趁火打劫) 상대의 위기를 틈타 공격한다.
제6계 성동격서(聲東擊西) 동쪽에서 소리 지르고 서쪽으로 공격한다.
편집국 편집장
2018-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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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사학자 춘강(春岡) 김영한(金英漢) 선생 별세
편집부
2018-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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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시청소년방과후아카데미, IT 교육 실시
[굿타임] = 이강부 기자 = 순천향대학교가 수탁 운영하는 아산시청소년교육문화센터(관장 남상인)에서 운영 중인 청소년방과후아카데미 꿈‧달‧아는 2일 KT IT 서포터즈(최현옥 강사)와 연계해 눈높이 맞춤형 IT 교육을 실시했다.
이날 교육은 청소년이 알아두면 좋을 파워포인트 애니메이션 활용법에 대해 진행했으며 앞으로의 활동에서는 포토스케이프와 스마트폰을 이용한 보정작업을 진행 할 예정이다.
수업을 수강했던 한 학생은 “도형을 이용한 애니메이션이 가장 재미있는 활동이었으며 진로를 결정할 때 컴퓨터와 관련된 직업을 선택하게 된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학생은 “학교에서 숙제를 내주거나 PPT 작성을 할 때 쉽게 할 수 있어 기쁘다”고 말했다.
아산시청소년방과후아카데미 관계자는 “청소년들이 이번 교육을 통해 컴퓨터 활용 능력을 향상시키고 나아가 국가자격증을 취득 등을 목표로 삼는 긍정적인 시간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청소년방과후아카데미 꿈ᐧ달ᐧ아는 꿈을 찾아 달려가는 아이들의 힘찬 날개짓이라는 뜻으로 여성가족부와 아산시가 지원하고 아산시청소년교육문화센터에서 주관하는 청소년들의 종합적인 방과 후 프로그램이다.
편집국 편집장
2018-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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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전문가로 성장하는 마중물...
편집국 편집장
2018-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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